항해일지: 한국예술종합학교 30주년
Logbook: 30 Years of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1997
2022
3. 3.
미술원 개원 (초대 미술원장 오경환)
1997. 3. 3.

미술원 개원 (초대 미술원장 오경환)

6개원 개원 예술교육과정

미술원은 타원과 비교해 개원 시기가 늦어졌지만, 정부는 일찍이 1993년 미술원 설립 및 운영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준비하고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연구 용역을 의뢰했고, 이듬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설립 및 운영방안 연구>(1994) 보고서가 출간된 바 있었다. 미술원의 설립은 개원 준비 당시 미술계에 보편적으로 확산되어 있던 문제의식과 자기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1990년대는 한국 미술계가 국제 교류를 확대하는 시기였다. 광주비엔날레가 막을 열었고, 미술관과 화랑을 통한 해외 현대미술 전시와 작품 수집이 크게 활기를 띠었으며, 미술인들의 해외여행과 유학이 빈번해져 해외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정보가 신속하게 국내로 유입되었다. 국제 교류의 기회가 늘어날수록 한국 미술과 해외 미술의 동시대적 흐름 사이에 편차가 존재한다는 점이 확인되었고, 이 같은 위기의식은 한국 미술과 국내 미술교육 전반의 개혁과 대안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인식의 공유로 이어졌다.

1996년 6월 17일, 위원장으로 위촉된 임영방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비롯해 미술계 인사 19명으로 구성된 미술원 개원 자문위원회가 출범했다. 자문위원들은 미술원이 기존 대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이에 따른 개설학과와 전공 분야, 모집 정원을 포함한 구체적인 운영 방안이 논의되었다. 이어서 개원을 주도할 미술원장 인선 작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 10월 19일 오경환 당시 동국대학교 교수가 미술원장으로 내정되었다.

개원 당시 미술원은 조형예술과(평면조형, 입체조형, 매체미술, 공예 등 정원 40명), 디자인과(시각디자인, 제품디자인 등 20명), 공간연출과(현 건축과 10명), 미술이론과(10명)의 4개 학과 편제를 갖추고, 11월 5일 신입생 모집 요강을 발표, 12월 2일부터 입시를 진행했다.

“기존의 미술대학 실기에서 중시해온 석고 데생과 같은 경직된 시험은 절대 치르지 않을 계획이며 작가로서의 조형 능력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실기시험을 생각 중 (...) 현대미술에서는 깊은 사고도 중요한만큼 학교 생활기록부도 성적에 반영할 방침" 오경환 미술원 초대원장 취임 인터뷰, 경향신문, 1996. 10. 23.

첫 입시를 치르던 때는 전임교수진이 구성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출제와 채점 등 입시관리는 오경환 원장과 주요 대학 중견 교수들로 이루어진 입시전형위원회에 의해 진행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교육부 소속 대학들과 달리, 이른바 ‘입시공동관리제’를 적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입시전형위원회는 미술원의 입시를 기존의 입시제도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중요한 기회로 보고 새로운 미술대학 입시의 모델을 만들었다. 미술원 입시는 3차에 걸친 단계적인 선발방식이었다. 조형예술과와 디자인과는 두 차례의 실기시험을, 공간연출과(현 건축과)는 영어·수학 필답고사와 논술 및 실기시험을, 미술이론과는 영어 필답고사와 두 차례의 논술시험을 실시한 후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구두시험을 실시했다. 기존의 미술대학들이 데생이나 수채화 한 장을 3-4시간 내에 그리게 하고 그것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것과는 달리, 미술원은 실기시험의 시간을 7-8시간으로 늘리고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게 하였다. 첫해 미술원 입시는 화제가 되었다. 1차 시험에서는 살아있는 흑염소가 시험장에 배치되어 그림의 주제로 출제되었고, 2차 시험에서는 ‘사랑과 증오’라는 추상적 개념을 지점토를 재료로 하여 입체적으로 표현하라는 과제가 출제되었다. 획일화된 입시 미술의 경향을 벗어난 미술원 입시는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후 일부 미술대학들이 입시 방법을 바꾸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미술원 개원 자문위원회
임영방(국립현대미술관장, 평론), 강은엽(계원조형예술학교 부학장, 조각), 곽남신(홍익대학교 교수, 판화), 김민수(서울대학교 교수, 디자인), 김승희(국민대학교 교수, 금속공예), 백남준(작가), 석영기(계원조형예술학교 교수, 판화), 안상수(홍익대학교 교수, 그래픽 디자인), 윤동천(서울대학교 교수, 판화), 윤명로(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회화), 윤정섭(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무대미술), 이두식(홍익대학교 교수, 서양화), 이용우(고려대학교 교수, 평론), 이주영(신구전문대학교 교수, 사진), 전수천(작가), 최승천(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목공예), 이길륭(문화체육부 예술진흥국장), 이건용(한국예술종합학교 교학처장), 임병수(한국예술종합학교 사무국장)

초대 교수진
조형예술과: 오경환(평면), 배진환(공예), 안규철(입체), 윤동구(평면·입체), 이주용(매체), 전수천(평면)
디자인과 : -
미술이론과: 강태희(서양미술사)
공간연출과(현 건축과): 김봉렬(건축이론), 민현식(건축설계)

교육 공간

미술원 개원 당시 구 석관동 교사는 학교본부와 연극원, 영상원이 이미 공간을 분할해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술원은 구 석관동 교사 본관 일부와 당시 공연윤리위원회가 사용하던 구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별관을 수리하여 사용했다. 1997년 2학기부터는 구 안기부 경비대 건물(현 학생회관)과 부속 창고 건물을 개조하여 추가적인 교육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조형예술과의 공방시설을 마련할 부지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공방 시설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도자나 유리 등 전공의 존립이 어려웠기 때문에 경기도 송추에 위치한 배진환 교수의 개인 작업장 대지를 학교가 임대하여 공방실기실을 마련했다. 2002년 12월 석관동캠퍼스 신축 기공식을 계기로, 2003년에 미술원은 현재 미술원이 위치한 구 국가정보대학원 건물로 이전했다. 당시 구 석관동 교사 본관에 위치하던 학교본부와 학생식당도 미술원과 함께 이전했다. 이 시기 즈음에 경기도 송추에 위치했던 공방실기실 또한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보수하면서 옮겨 왔다. 공방실기실은 옮겨온 이후에도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현재에도 ‘송추동’, ‘송추공방(동)’ 등으로 불린다.

“제대로 된 공간이 배정되는 데에는 5년이 걸렸다. 디자인과 학생들은 건축과에서 쓰는 제도판을 이삿짐 트럭 삼아 짐을 옮겼다. 보따리장사라고도 했다. 더군다나 첫해에는 강의실이 따로 없었다. 작업실, 교수님 연구실, 영상원의 빈 강의실,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영상원에서 수업을 할 때는 시험을 보다가 쫓겨난 적도 있었다. (...) 그때에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야작(야간작업)’이 일상 생활이었다. 야작 신청을 하지 못했을 때도 기를 쓰고 작업을 했다. 경비 아저씨 열쇠소리가 들리면 옥상으로 숨었다. 때로는 컴컴한 작업실에 문을 잠그고 잠복하기도 했다. 아저씨가 지나가면 촛불을 켜고 작업을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143호, 2008. 10.
미술원 개원식, 1997, 한국예술종합학교 디지털 예술정보 서비스(DAIS).
조형예술과 수업 모습, 1999-2001, 한국예술종합학교 6개원 설립사(2000) 외.
공방실기실.
조형예술과 2차 입시 모습, 2007. 12. 12., 한국예술종합학교 디지털 예술정보 서비스(DAIS).
미술원 파운데이션 과제전, 2013, 한국예술종합학교 미디어콘텐츠 ATLab.
디자인과 수업 및 개인 과제 준비 모습, 1999-2000, 한국예술종합학교 6개원 설립사(2000).
공간연출과(건축과) 수업 모습, 1999-2000, 한국예술종합학교 6개원 설립사(2000).
구 석관동 교사 배치도, 구 석관동 교사 도면, 2002.3., 한국예술종합학교 시설과.
석관동 종합 캠퍼스 발전을 위한 변화, 2003.9.,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61호. 미술원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다는 내용의 기사.
캠퍼스 신축 이전 석관동 교사 약도, 2005.3.,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84호. 미술원이 구 석관동 교사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후의 교사 이용 현황이 나타나 있다.
미술원 10주년 기념전, 2007.11.9., 한국예술종합학교 디지털 예술정보 서비스(DAIS). 2007년 11월 9-18일, 석관동캠퍼스 신축교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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